전등이 깜빡였다. 불이 한 번 꺼졌다 켜진 정도는 그리 흥미로운 사건이 아니었는지, 소파에 몸을 늘어뜨리고 있던 사내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폭우가 쏟아진 건 한참 전인데 아직까지도 그 여파가 가시지 않은 모양이다. 방 안은 어스름했다. 방이라기엔 빈 구석이 많고, 거실이라기엔 면적이 좁은 곳이었다. 콧등을 타고 걸쳐놓았던 책이 스르륵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느릿하게 올라온 손이 표지 위를 덮으며 얼굴에 펼쳐진 페이지 사이로 손가락 하나를 끼워 넣었다. 가려졌던 눈꺼풀 위로 빛이 닿으니 자연스레 눈가가 찌푸려졌다. 눈부심에 적응하려던 다자이는 붙잡은 책을 아예 가슴께로 치워내고 나서야 완전히 눈을 떴다. 다시 생각해보니 비가 내린 지 그리 오래된 것 같지도 않았다.
“음…….”
잠을 자지는 못했지만 잠을 잔 것처럼 몸이 뻐근했다. 직접 움직이는 대신 목으로만 스트레칭하는 것처럼 앓는 소리를 내고는 줏대 없이 의견을 번복했다. 역시 며칠은 더 지난 느낌이었다. 본래 그의 성정은 균일한 편이라기보다는 다소 오락가락하는 쪽에 가까웠다. 잘 짜인 규율 아래에 있기에는 보이는 것이 너무 많기도 했고, 어처구니없지만 보이는 것에 비해 정작 보고 싶다고 느껴본 것은 별로 많지 않아서 그렇기도 했다. 오묘한 일이었다. 다자이는 문득 인간이 지닌 충동이라는 것에 대해 고민하다가, 어쨌든 그는 좀 막 사는 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살아간다’는 행위의 기준이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충족된다는 전제 하라면 말이다.
그래서 다자이는 조금 뒤에 한 번 더 생각을 바꿨다. 사실 시간이 어느 정도나 흘렀는지 모르겠다고. 이 장소 어딘가에 분명 시계가 있었던 것 같은데, 초침 소리를 몇 번이나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기억은 할 수 있지만 그럴 의욕이 없었다. 애초에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세상에 그리 많지 않아서, 멍청해지는 일에도 노력이 필요했다. 시간을 가늠한답시고 한참 눈을 깜빡이지 않았더니 시야에서 흐릿하게 전구 불빛이 번졌다. 다자이는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도통 나가질 않으니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감금을 당한 건 아니었으나 처신은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근거지가 없으면 종종 그를 방문하려는 객이 목적지를 잃기 때문이다. 탐탁지 않게도 다자이의 추론 방식은 마피아의 수장인 자와 흡사했다. 예상대로라면 마피아는 그렇게까지 열성적으로 다자이를 찾지 않을 테지만, 유독 조직과 맞지 않게 신경이 날카로운 개가 하나 있어 멋대로 돌아다니기가 다소 귀찮았다. 더군다나 앞으로 못해도 2년은 존재하지 않는 존재여야 하는데…….
아니지. 이제는 얼마 안 남았을지도 모른다. 굳이 정확하게 세어보지 않아도 최소한 2년보다는 적을 것이 자명했다. 물론, 은신처를 발각당하지 말아야 하는 건 일 년이 남든 하루가 남든 매한가지다. 그러니 제일 좋은 방법은 어딘가에서 나가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억지로 품을 들여 다른 방법을 찾아보았자 지금보다 더 사는 맛이 날 것 같지도 않았다. 본인이 사는 맛을 제대로 모르는 인간이라 더욱 그랬다. 추측하건대 그의 주변인들 중 그 누구도 그걸 아는 이는 없을 터였다. 캐물어보면 누군가 하나, 짐작 정도는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그렇대도 아마 몰랐을 텐데. 설마 알고 있었어? 이젠 되어먹지 못한 질의응답도 쉽지 않았다.
아무튼, 한 곳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행위는 어지간히도 단순무식한 방법이라 그런지 극심한 부작용이 나타났다. 종종 시간 세는 법을 깜빡하고, 손에 대지 않은 담배가 어딘가에서 피어오르기도 하고, 아주 가끔은 당장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어지기도 하는데 잠깐 심심하게 앉아있으면 또 반쯤 괜찮아진다. 그게 가장 문제였다. 멀쩡해진 기분이 들면 갑자기 세상이 낯설게 느껴지고, 그가 아는 낯선 세상이란 떠오르는 수면 너머의 것밖에 없어서 뜬금없이 물을 뒤집어쓰고 싶어졌다. 그러다보면 창문 바깥에서 들어오는 조명이 햇빛이었다가 달빛이었다가 했다. 지금은 달빛이네. 비가 내려서 그런지 무언가 타는 냄새보다는 습기가 비산해 있었다. 창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상당히 은폐된 곳인지라 이제 보니 창문보다는 그냥 구멍 비슷한 것에 가까웠다. 페트병에 붙잡아둔 벌레가 죽지 않도록 뚫어놓는 그런 거. 몸을 숨기는데 창문이 있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이긴 했다.
무언가 부재한 공간 속에서 다자이는 마냥 칩거한 채 지내는 것도 최악까진 아니리라 여겼다. 방황하지 않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데도 머물 장소가 필요한 이유는, 아직 돌아와야 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으로 이 장소를 향할 이가 더 이상 남지 않으면 아무래도 좋을 일이 될 것이다. 사고가 이렇게까지 미치니 아무리 사방의 공백에 익숙한 그라도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구체적으로 정의하기 어려웠으나 썩 유쾌한 감정이 아니라는 사실은 명백했다.
더 글자를 읽을 기분이 들지 않아서 다자이는 들고 있던 책을 덮어 소파 아래로 대충 떨어뜨렸다. 진지하게 머리를 굴려보려고 했다. 정말 며칠이나 지났지. 혹시 이러다가 고독사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자살일까. 내가 고독사孤獨를 할 수 있나. 차라리 고독蠱毒을 삼키는 건 결과가 확실할 테지만 고통 역시 확실할 것이기 때문에 싫은데, 혹시 같이 죽어줄 사람이 생기면 다를지도 모르고, 어쩐지 술을 좀 마시고 나면 알 수 있으리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인기척이 느껴진 건 그 때였다.
다자이는 기계적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행인이 지나가다 들릴 일이 전혀 없다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로 인적이 드문 위치다. 아니나 다를까 발자국 소리를 들으니 주인을 쉽사리 알 수 있었다. 사실 찾아올 사람이 무척이나 국한되어 있기도 했다. 고개를 옆으로 휙 돌려보았다. 나서서 정리하지 않아도 처음부터 있는 게 별로 많지 않았다. 시야에 걸리적거리는 건 부스스하게 흩어진 앞머리뿐이었다. 잠시 방을 둘러본 그가 마침내 허리를 숙이고 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워 옆에 있는 탁자 위로 올려놓는 동안 어느새 다자이를 찾아온 사람이 문을 두드렸다.
몸을 일으켰더니 발목 근처가 서늘했다. 근래에 들어 키가 점점 자라고 있었다. 그것도 꽤 많이 자라려는 모양인지 조금만 넋을 놓고 있으면 바지가 금방 짧아졌다. 바닥을 내려다보고 숨을 내쉰 그는 문을 열어주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냥 제 집처럼 마음대로 드나들 법도 한데. 그런 전적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가만히 서 있는 건 내가 움직여주길 바라서인가? 다자이는 대부분의 상대가 자신처럼 인체의 행동을 전부 계산하지 않는다는 걸 반쯤 망각한 채 고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제법 컸는지 근처에 있던 작은 들짐승이 재빠르게 도망가 버렸다.
“어서 와, 레이 씨.”
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안에서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멍하니 닫힌 손잡이를 바라보고 있던 레이는 고개를 들었다.
“응……, 안녕.”
한 박자 늦은 인사를 들으며 다자이는 몸을 옆으로 틀어 길을 내어주었다. 처음 이 정도 거리에서 마주했을 때는 그가 올려보던 입장이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입장이 바뀌었다. 언뜻 드러난 거처 안으로 레이가 모습을 감추자 열렸던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다자이는 그대로 문을 등지고 서서 몇 분 전까지 그가 늘어져있던 소파를 향해 걸어가는 레이를 응시했다. 무겁지 않으려나 싶을 정도로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느 순간 레이가 다자이를 마주보고 앉았다. 그제야 문고리에서 손을 떼어낸 그가 발랄하게 물었다.
“레이 씨, 뭔가 마시겠어? 차? 커피? 애석하게도 대접할 게 별로 없어서 말이야. 다행히 식수가 떨어지진 않았어. 여차하면 빗물을 끓여보려고 했는데, 그럴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더라고.”
인사말에 사족을 덧붙이며 다자이가 몇 걸음 다가왔다. 물을 끓이러 가는 방향이 아닌데? 새카만 동공에 함축된 의문을 읽은 다자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마주보는 방향의 탁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상투적인 손님대접에 그리 연연할 만한 관계는 아니었으므로 레이는 그러려니 했다. 그나저나 앉은 곳이 차갑지 않은 걸 보면 여기서 잠이라도 잤던 걸까. 허벅지 근처까지 늘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레이의 손가락이 소파 위를 쓸었다.
“흐음.”
새삼 다른 사람이 움직이는 걸 보는 게 무척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무과는 사람을 어딘가 처박아놓고는 귀한 몸 건사하게 잘 지내시냐고 놀러올 위인들이 아니니 당연했다. 레이만 해도 몇 년 전만 해도 침대를 찾아가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만큼 낯익은 존재였는데, 이렇게 책상에 앉아서 보니 약간은 낯설었다. 세월이란 그런 걸까. 마지막으로 본 게 길어야 몇 달일 텐데도 아득하게 느껴졌다. 이게 다 하루하루를 너무 심심하게 보낸 탓이다. 다행스럽게도 다자이에게는 어릴 적부터 혼자 떠드는 습관이 들어있어서, 대화하는 법까지 잊어버리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레이 씨가 나를 잊어버린 줄 알았어. 그런데 이 시간에 홀로 지내는 사내를 찾을 만큼 신경 써주고 있었다니, 감동이군. 아, 아직 대답을 못 들었네. 물 마실래? 내가 기억하기로는 코트를 입어도 밤중에 걷는 게 생각보다 추웠는데.”
“따뜻한 물이 있어?”
“불이 있으니 걱정 마. 또 그렇게 열악한 곳은 아니거든. 세상이랑 단절했다고 가스레인지 대신 모닥불을 써야 한다면 이 얼마나 불공평한 처사겠어. 레이 씨는 요즘 문명사회에서 바쁘게 지내는 모양이니 거리를 둘 필요가 있어 보이지만.”
“음…….”
“레이 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꽤 많은 야근을 한 것처럼 보여서 그래. 미래의 내가 몸담을 직장이 블랙기업이라니 회의감이 드는군. 겨우 과다 업무를 해보자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니, 구직활동도 정말 쉬운 일이 아니야.”
아주 평범한 대화는 아니었지만 다자이의 주변인들은 대부분 그의 허튼소리에 적응했으므로 상관없었다.
“읏차.”
레이가 대꾸를 할지 말지 정하는 사이 다자이는 이번엔 정말로 레이에게 뭔가를 가져다 줄 요량으로 탁자에서 내려왔다. 문을 열어줄 때 본 달은 제법 높은 곳에 떠 있었다. 그 사실로 미루어보아 꽤 늦은 시각인데, 다자이가 살펴본 레이는 막 일을 마치고 온 복장이었다. 레이가 종종 탐정사에서 일을 하다가 찾아왔을 때에도 저런 옷을 입었기에 쉽게 알아봤다. 붕대를 감은 손으로 주전자에 물을 따르니 물방울이 쇳덩이에 마구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간이 가스레인지 버튼을 누르려다가 가스가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뒤편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는데 그가 물을 준비하는 사이에 소파에 기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누웠거나. 깜빡한 가스를 채우고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타닥타닥, 하고 불이 올라왔다. 문명이니 어쩌니 지껄인 말이 무색하게도 한참 전에 깜빡였던 전등이 다시 한 번 점멸하며 한순간 새빨간 불길이 시야를 사로잡았다. 벌겋게 타오르는 잔상에 잠깐 멍해졌던 다자이가 고개를 뒤로 돌리자 레이는 천장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습관처럼 입이 열렸다.
“얼마 전에 비가 많이 왔었는데, 그 때부터 가끔 그러더라고. 며칠 전까지는 괜찮았는데 요즘 점점 심해지고 있어. 곧 갈아 끼우는 게 좋겠지만 귀찮아서 미뤄두었지. 사실 불이 좀 꺼져도 지내기 불편하진 않을 것 같고. 오히려 잠들기 편할지도 몰라. 자네도 알다시피 난 어둠에 익숙하잖아.”
“그렇구나.”
“혼자 사는 것도 그리 녹록하지는 않더군. 그냥 지내는 정도면 할 수 있겠는데 말이야, 정작 ‘사는’ 게 어려운 부분이라는 거야. 인간의 신체라는 것이 참 다루기 까다로운 물건이지 않나. 손이 많이 간다고. 뭔가 먹어주지 않으면 안 되고, 뭔가 움직여주지 않으면 금방 까먹는단 말이지. 그런 도중에 조금만 불편하면 귀신같이 알아채버려. 나는 그런 것들에 꽤 무뎌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근래엔 유독 사방이 조용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신경을 쏟을 때가 생기더란 말이네. 레이 씨는 그런 걸 느껴본 적 있어? 왠지 당신이라면 공감해줄 거라고 생각했어.”
그가 관성적으로 말을 이어가는 내내 주전자 뚜껑이 시끄럽게 달그락거렸다. 흡사 주전자가 훼방을 놓는 모양새였다. 주전자도 방주인을 닮아 뭔가 글러먹은 게 분명했다.
“지금 레이 씨가 누워있는 소파도, 사실 얼마 전에 실밥이 터졌었거든. 혼자 터진 솜을 메워보려고 했는데 마땅한 물건을 못 찾았지 뭔가. 불쌍한 내 처지가 이런데 당장에 사러갈 수도 없잖아? 그래서 베개 하나를 희생시켰지. 그런데 뜯고 보니 정작 실을 다시 꿰맬 만한 도구가 없는 거야. 결국 무시하고 지내려고 했는데, 그 뒤로 이상하게 소파에 앉을 때마다 실밥이 옷에 걸리더군. 나한테 항의라도 하는 것 같았어. 옷을 입지 말든가 소파를 고치든가 하라고. 정말 자기주장이 확고한 소파였지……, 지금 이 녀석처럼. 정말 시끄러워서 더 못 들어주겠네. 안 그래, 레이 씨?”
점점 크게 달그락거리는데도 인간이 신호를 알아듣지 못하자 주전자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좁은 구멍 사이로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신경질적으로 김을 뿜어대는 통에, 다자이는 쉴 새 없이 말을 하도록 프로그래밍 된 기계처럼 줄줄 뱉어내던 문장을 끊고 기어코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이거 참.”
고개를 돌리자마자 뿌옇게 올라온 수증기가 눈앞을 가렸다. 뒤통수가 뜨겁게 느껴지지 않은 게 기이할 정도였다. 탁한 열감에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어 잠시 입을 다문 다자이는 팔을 멀찍이 뻗어 가스레인지 버튼을 내렸다. 딱히 꺼내려고 하진 않았지만 생각해보니 그가 혼자 찻잎을 내려먹을 성정은 아니었던 탓에 우려낼 차도 없었다. 왜 있다고 생각했지? 언젠가 레이가 들고 온 적이 있었나. 몇 달 전이었는지 함께 뭔가를 마셨던 기억은 있는데 시간 감각이 모호했다. 사회성 동물을 표방하지 않고 홀로 지낸 시간이 오래되어서, 점점 귀찮은 일이 많아졌다. 원래도 귀찮아하는 건 많았지만.
뜨거운 물을 가득 담아 돌아가 보니 레이는 눈을 감고 있었다. 웅크린 채 팔걸이 쪽으로 반쯤 기울어진 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으나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등허리를 타고 길게 덮여있는 머리카락이 이불과도 흡사한 모습이었다.
“레이 씨, 자는 거야?”
“……그러게, 소파도 힘들었겠네.”
“……잘 자.”
제아무리 홀로 떠드는 습성을 지닌 사내라 해도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떠드는 일이 잦진 않았기에 목이 아픈 기분이 들었다. 다자이는 레이를 위해 떠온 물을 본인이 마셔 목을 축인 다음 소파 옆 탁자에 내려두었다. 레이가 도착하기 전까지 읽고 있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어린이 과학자를 위한 기초 백열전구 설계서 –소학교 편-」. 마침 타이밍도 좋게 전등이 또다시 점멸했다. 며칠 내로 수명이 다할 거란 짐작이 들었다.
늦은 시간이니 대다수 평범한 사람이라면 피곤할 법 했다. 다자이가 보기에 레이는 평범함과 다소 거리가 멀었으나, 레이에게 다른 모든 분야와 달리 마이너스인 쪽으로 유별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체력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수면이겠지만, 하여튼 뭔가를 하고 나면 금방금방 곯아떨어져서 한참을 못 일어났다. 안 일어나는 걸 수도 있고. 마피아의 건장한 사내들을 훨씬 웃도는 신체능력을 생각하면 후자를 충분히 의심해볼 법 했다. 아니면 심적인 영향이 큰 경우일지도. 겉보기보다 겪은 것이 훨씬 많아 보이는 사람이니 가능성이 있었다. 다자이의 꽤나 어린 시절부터 함께했던 것치고 다자이는 레이의 내력에 관해 아는 바가 많지 않았다. 이따금 그의 능력이 닿는 대로 찾아보기도 하는데 그럴싸한 건 없어서 오리무중인 상태였다.
다자이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탁자에 등을 기대고 스르륵 미끄러지듯이 앉았다. 레이는 몸집이 그리 큰 편은 아니었기에 소파에도 빈자리가 있었지만 괜히 딱딱한 곳에 앉고 싶은 기분이었다. 한기 서린 바닥이 생각보다 더 차가워서 일 초 정도 후회했다. 탁자 위에 올려둔 뜨거운 물을 다시 가져오려다가 팔을 뻗기 번거로워서 관두었다. 머리 위로는 뜨겁고 몸 아래로는 차갑다니. 이젠 오락가락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반으로 쪼개지려는 모양이었다. 얌전히 양반다리를 하고 발 위로 손을 올려두었다.
감긴 눈을 바라보니 참 신기했다. 레이가 잠들 때마다 느꼈지만 상상이상으로 많이, 잘 자는 사람이었다. 어떨 때는 며칠이 지나도록 안 일어나기에 호흡을 하면서 죽는 방법도 있나 찾아봤다. 선천적 요인과 후천적 요인이 전부 겹쳐 도통 수면을 챙기지 않는 그로서는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 그렇게나 떠들어댔는데 정말 잠들어버린 얼굴을 마주보니 할 말이 없어졌다. 그렇잖아도 문을 연 순간부터 지친 기색이 역력하긴 했다. 정식 사원도 아닌데, 일이 많은가. 그토록 오래 붙어있을 정도면 탐정사원이라는 자들도 레이와 퍽 어울리려 노력하나보지 싶었다. 이번에도 며칠이나 자고 가려나. 차라리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레이가 며칠 내내 잠들어 있는 동안, 온종일 그 곁에 붙어있어 본 적은 별로 없었으니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탁자 서랍에 머리를 기대자 툭 튀어나온 손잡이가 불편하게 뒷머리를 눌렀다. 아랑곳 않고 무게를 싣자 눌린 머리가 조금씩 아팠다. 물을 너무 오래 끓여서인지, 아니면 나갈 구석이 없어서인지, 잔뜩 솟아올랐던 수증기가 여태 어딘가에 남아있는 듯 했다. 아무리 사람 숨어있는 곳이라지만 참으로 통풍이 별로인 곳이었다. 이러다 며칠 내도록 폭우라도 내리면 가구에 곰팡이가 슬기도 전에 제 자신이 먼저 곰팡이가 되어버릴 게 분명했다.
하긴, 바람이든 뭐든 쉽사리 드나들고 왕래하는 일이 가능했다면 그는 지금보다 훨씬 되어먹은 사람이었을 거다. 털어내야 할 것을 제 때에 털어내고, 머금어야 할 것을 필요한 만큼만 머금고, 모두가 그렇게 살 수 있으면 이 세상에 갖은 병폐가 존재하지도 않을 테지. 인간이라는 게 본래 천성이 구질구질한지는 몰라도 대부분은 그 구질구질한 미련을 못 버려서 악의를 갖기 시작한다. 다자이는 난무하는 악의가 온갖 방식으로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에서 지내보았는데, 가장 죽음이 근접한 상황에서조차 삶의 이유나 살고자하는 욕구의 근간을 제대로 토해내는 이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래서 이유도 없이 열심히 살거나, 살려보려는 사람이 특이해 보였다. 타인을 향한 순수한 악의는 넘쳐나는데 정작 다른 형태의 발산은 보기 드물지 않은가. 모리 오가이도 어떨 때는 다자이를 살리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지만, 아무래도 그는 처음부터 결이 달라서 논외였다.
옆에서 레이의 몸이 점점 기울어지자, 다자이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뻗어 그 몸을 지탱해주어야 했다. 잠든 숙녀를 건드리는 것은 예의가 아닌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반사적으로 읊조리며 늘어진 어깨를 쥐고 소파 안쪽으로 가볍게 밀었다. 유독 입을 잘 놀린다는 얘기는 자주 듣지만 그 탓에 어려움을 느낀 경험은 별로 없었으나, 이상하게 레이는 모종의 이유로 종종 그를 곤란하게 했다. 누구보다 죽음과 친숙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삶에 목매는 모습이 보인다든가, 동류라고 여겼는데 설명하기 힘든 괴리가 느껴질 때가 있고, 심지어 그게 마냥 싫지만도 않을 때라든가.
정말 잘 자는군. 그가 건드리면 깰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한 소리 들을 각오를 했지만 기껏 먹은 마음이 무색하게 레이는 잠잠했다. 불현듯 레이가 오기 전 한참 골몰하던 충동성에 대한 고찰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본인을 통제하지 못하는 인간은 십중팔구 상당히 난폭하거나 추하기 마련이다. 혹자는 그런 게 바로 인간성이라던데, 설득력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스웠다. 그런 사유로 다자이의 수없는 자살은 많은 수가 죽고 싶다는 계획 하에 이루어졌었다. 자살뿐 아니라 많은 것들이 그랬다. 그가 겪은 무수한 경험 속에서 충동적인 인간은 다루기 쉽다고 간주할 만 했다. 적당히 건드리면 알아서 나서주기 때문에, 생명을 효율적으로 셈하고 처리하는 데에 있어 그만큼 효과적인 무기는 찾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에야 가지게 된 좀 다른 시각이 있는데, 정말 예상치 못하는 것만이 진짜 충동이지 않을까 하는 거였다. 계산 가능한 변수는 결과론적으로 봤을 때엔 변수가 아닌 것처럼, 예상 가능한 충동은 그저 평상시 심리 기저에 있던 욕구가 특별히 과하게 발현된 것일 뿐 전조 없이 일어나는 증상이 아니라는 소리다. 그렇기에 다자이는 미미한 곤혹을 느꼈다. 어깨를 따라 늘어진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는 게 자신의 망상인지 아니면 정말 벌어지고 있는 일인지 한순간 헷갈렸기 때문이다. 머리를 쓰다듬거나 만지거나 하는 일은 그들이 관계에서 자주 있던 일인데, 이번 한 번만은 유난스럽게 느껴지는 당위를 찾아내기 어려워서 그랬다. 금방 덜어냈지만 역시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를 둘러싼 빈자리가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공허함을 느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이래서 익숙함이 무섭다는 소리가 있는 건가.
쓸어내리던 머리칼을 손가락 사이로 들어 올리자, 어슴푸레한 전등이 하얀색을 더욱 창백하게 물들였다. 고요한 틈 사이로 흐릿해지던 전구에서 자그맣게 타오르는 소리가 나더니 한 번 더 불이 꺼졌다. 다자이는 눈길을 내렸다. 잠든 이의 얼굴이 찰나 가까워졌다가 다시 되돌아갔다. 만져대던 머리카락의 감촉이 입술에 선명하게 남았다. 샴푸 향 대신 찬바람을 머금은 냄새가 났다. 이번에는 다시 불이 들어오는 간격이 조금 길었다.
“……정말 안 일어나네.”
이게 다 레이 씨가 나 혼자만 떠들게 내버려둬서 그런 거라고. 한참이나 어울려주지 않다가 찾아왔으면 한두 마디 정도는 나누어 줄 수 있지 않느냔 말이지. 별로 억울함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다자이는 억울함을 느끼는 것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선택하고, 그가 막지 못한 일이지만 너무 짧은 시간에 주변이 텅 비어버려서 홀로 지내다 보면 그의 주변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지나간 꿈처럼 느껴지곤 했다. 눈을 떠 보면 여느 때처럼 병실 천장을 보면서 깨어나거나, 아니면 생명이 드문 어딘가에서 실패한 자살의 혼수상태를 억지로 떨쳐내야 하는 그런 상태는 아닐까. 시간 세는 법은 그렇다 쳐도 현실감을 잃는 건 이렇게 지내기 전부터도 몇 번씩 겪은 일이라 부작용이라 치부하기도 힘들었다. 천성적인 중증이라기엔 변명이 영 궁색했다. 그게 사실인데도.
다자이는 느리게 손길을 거두며 소파 아래로 흩어져 있던 머리카락을 전부 정리해서 소파에 올려두었다. 그 와중에 새삼 무겁겠다는 감상을 남기며 덮어줄 만한 무언가를 찾아 몸을 일으켰다. 찬 바닥에 한참 유기했더니 얼마나 됐다고 다리가 뻣뻣한 느낌이었다. 소파도 그랬고, 주전자도 그러더니 하다하다 이젠 몸도 말을 안 듣는 게 순 제멋대로인 것투성이다. 그는 멍청해지는 기분과 통 가깝지 못한 부류여서 바보 취급을 받아본 지도 오래인데, 요즘 들어 특이하게도 그 빈도가 잦아지고 있었다. 잠자리에서 이불을 질질 끌어와 소파 위로 펼쳤다. 어차피 그는 쉬이 잠들지 못하는 편이라 며칠 정도 이불을 쓰지 않아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